성스러운 섬, 스리랑카 이야기

7. 폴론나루와의 아름다운 호숫가, 그리고 교통지옥 캔디!(1. 13. 수)

노정 2016. 2. 7. 02:53























오늘의 일정 : Polonnaruwa, Lildiya Family Resort - (bicycle) - 호숫가 - Lildiya Family Resort – (Local Bus) - Candy Bus Station Railway Station – (tuk tuk) - Lake Bungalow – (bus) - Railway Station – Local Market - (bus) - Lake Bungalow

눈을 떴다. 커튼을 열자 마당 너머 호수 위에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다. 대충 세수하고 대충 바르고 얼른 나갔다. 머뭇거리다 안개를 놓칠까 조바심을 하면서.
숙소 대문에서 열 걸음만 옮기면 호숫가다. 여긴 이름난 관광지도 아니고, 중심지도 아니고, 그냥 동네 호숫가다. 우리나라에서 집집마다 차가 몇 대씩 세워져 있듯 집 근처에 툭툭이 한두 대씩 주차되어 있고, 파파야 나무 윗둥치에 아무렇게나 빨래가 널려 있는, 그리고 호수 어귀에 빈 배가 뒹굴고 있는...
피부에 스며드는 싫지 않은 새벽 습기, 풀꽃향기. 어스름한 호수, 우두커니 앉아 있는 잠 덜 깬 물새들... 극성맞아 보일지도 모르지만 이런 것들 때문에 나는 여행지에서 늦잠을 잘 수가 없다. 새벽엔 이 모든 것들과의 조용한 교감이 이루어진다. 새벽잠과도 유명 관광지와도 바꿀 수 없는 것, 이건 내가 나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
하나 둘 동네 사람들을 만난다. 눈으로도 인사하고, 마음으로도 인사한다. 처음 보는 외국인이 꺼낸 “아유보완” 한 마디에 동네 아이들은 자지러진다. 그리고 엄마에게 달려간다. 아마 자랑하는 거겠지? “저 외국인이 나한테 인사했어.”
감사하게도 이곳 사람들은 사진 찍기를 좋아한다. 사진기가 신기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누군가를 만나고 관계를 맺는 것을 행복해하는 것 같아 보인다. 편견도 없어 보이고, 무얼 바라는 것도 없어 보인다. 너무 귀여워서 사탕이라도 쥐어주고 싶은 아이도 많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내 기분에 따라 한 행동이 그 아이들을 “손 벌리는 아이”로 만들까 두려워서이다. 아이들이 내게 곱고 수줍은 웃음만 건네는 것처럼 나도 아이들에게 반갑고 고마운 눈빛만 보내자.
그래서 그들의 사진은 귀하다. “신기한 원주민”의 사진이 아니라 짧은 순간 눈빛과 마음을 나눈 내 친구의 사진이기에. 심지어는 렌즈 조절을 아주 깐깐하게 해 사진을 아주 잘 찍지도 못했다. 내가 렌즈를 만지는 동안 내 친구가 심심하고 쑥스러울까 하는 마음에...
이렇게... 여행을 거듭하면서 나는 조금씩 더, 친구가 되는 데에도 조심스러워진다. 마음을 활짝 열되 상대방에게 상처가 되지 않도록...

아침 식사는 어마어마했다. 바나나 한 (커다란) 송이, 파파야 한 (큰) 접시, 파인애플 한 (큰) 접시, 수박한 (큰) 접시, 식빵 한 봉, 버터 한 (큰) 통, 달걀후라이 두 개, 잼 큰 통, 누들 한 (수북한) 대접, 소스 한 통, 커피 한 주전자, 홍차 한 주전자, ‘호트 워터’ 한 주전자... 그리고 직접 서빙을 하는 할아버지 사장님의 미소 한 바구니...
아이고... 이 어른이 아침부터 잔치를 하시나... 이런 엄청난 환대라니...
웬만해선 음식을 찍질 않지만 이건 그냥 ‘음식’이 아니다. 고맙고 황송해서라도 이건 찍어서 기억해야지. 곁에서 지켜보시던 사장님이 직접 우리를 찍어 주신다. Thank you에 great에 fantastic까지 섞어 가며 우리는 엄지를 치켜 올렸다.
어젯밤에 내 침대 나무가 좀 썩어서 온 침대가 개미소굴인 걸 그냥 참길 잘했다.(소중한 모기퇴치제 반 병을 침대에 발랐다!) 욕실 물이 구멍으로 가지 않고 자꾸만 방 쪽으로 스며 오는 걸 그냥 참길 잘했다.(지저분한 욕실은 모기향을 피워 참아냈다.) 호수가 바로 보이는 2층 방이라 참아야지 했지만 개미떼가 온몸으로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공포와 밤새 싸우느라 나는 두 다리를 펴고 자지 못했다.
그 때 화냈더라면,(그건 손님으로서의 권리이기는 하지만) 오늘 아침의 이 성대한 잔치에 얼마나 낯이 뜨거워졌을까?
이곳은,... ‘논리’도 ‘똑똑함’도 ‘계산’도 무색하게 한다. 딱부러지고 똑똑한 게 진짜 똑똑한 것일까 하는 의문을 계속 갖게 한다.

어젯밤 돌아오는 길에 보았던 호숫가로 자전거를 타고 나갔다. 꼬불꼬불 마을길을 지나 좁고 긴 아스팔트 길... 자전거 위에서는 바람을 만나고, 자전거 아래에선 호수와 풀과 새들을 만난다. 어제 잔뜩 찌푸렸던 하늘까지 호숫빛이다.
완전한 자유란 없는가 보다. 유일하게 내 마음을 붙들어 매는 나의 파트너! 자전거도 안 잠그고 앞뒤로 오는 차도 신경 안 쓰고, 무리지어 오는 머슴애들에게도 완전히 무장 해제가 되어 있는, 고삐가 완전히 풀려 하늘로 훨훨 날아가고 있는 그 녀석 때문에 마음을 졸여야 했다. 잔소리를 하다가 서로 감정이 상할까 봐 도망쳐 버렸다. (사실 나도 초보 때엔 그랬는데...)
나쁘지 않았다. 둘에서 하나가 된, 또 다른 해방감. 상대방이 싫어서가 아니라 완전히 혼자일 때 느끼는 자유는 둘이서 느끼는 자유와는 또 다르다는 걸 그 녀석도 나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각자 다시 평화로워졌다.
한참을 가다 보니 사람들이 의식을 치르고 있다. 가네쉬를 모시는 걸 보니 힌두 의식인가 보다. 조심스럽게 다가갔더니 옆에서 준비하는 사람들이 어서 오라고 반갑게 맞아준다. 그 중 한 사람은 한국에서 일한 적이 있다며 끝날 때까지 있으라고 붙잡는다.
“먹고 가요. 여기 음식 맛있어요.” 또박또박 한국어로... 그리고 넉 달 되었다는 예쁜 딸까지 보여준다. 쿠마라를 만났을 때와 똑같은 미안함, 그리고 고마움과 부끄러움...
승하에게 전화를 했다. 이런 경건한 의식을, 이런 따뜻한 사람들을, 그리고 승하가 신기해하고 좋아할 음식들을 보니 제일 먼저 그 녀석 생각이 난다.
승하는 사탕수수를 처음 먹어본다며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그리고 씹던 수숫대를 삼켜야 할지 버려야 할지를 고민했다. 사랑스럽다. 에이, 못 미워하겠다.

숙소로 돌아와 사장님과 작별을 했다. 어제 쿠마라를 그냥 보낸 것이 내내 후회가 되어서, 오늘은 사장님과 사진도 함께 찍었다. 그리고 툭툭을 타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또 다행히 가자마자 캔디행 버스가 있다. 우리의 행운은 어디까지 계속될까? 어쩌면 이 계속되는 행운의 절반 이상이 대책없는 왕초보 이승하 덕분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 내심 고마웠다. 저렇게 착하고 순수한 마음을, 하늘 신도 땅 신도 돕고 싶지 않을까? 그분들도 아마 귀여울 것이다.

행운은...
거기까지였나 보다!
차는 돌고 또 돌았고, 시커먼 매연을 뿜어댔고, 캔디 인근 어느 곳인가부터에선 가기보다 서기를 자주 했다. 1시간 45분쯤 걸린다던 버스는 세 시간이 넘게 걸렸다.

캔디에 내렸다. 혼잡, 번잡, 혼란, 사람의 홍수! 매연, 고함, 바가지...
게다가 호기롭게 이틀 전에 예매하려 했던 하푸탈레행 기차표는 전석매진! 우린 한 순간에 멍해졌고, 다리가 풀렸다.
겨우 마음을 가다듬고 툭툭을 흥정하고, 숙소에 짐을 풀고, 다시 역에 가서 “전석매진”을 한 번 더 확인하고(한번으로는 도저히 그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시장을 향해 걸었다.

시장이 최고다, 몸도 마음도 지쳤을 때는!
값 싸고 푸짐한 열대과일들, 처음 보는 신기한 이 동네 ‘불량식품’들을 이것저것 샀다. 폴론나루와 숙소에서 침대에게 모조리 바친 모기퇴치약도 다시 하나 사고, ‘적당해 태워서 비타민 D 보충하’려다 껍질째 익혀버린 내 오른팔을 위한 화상연고도 하나 사고... 내일 페르데니아에서 만날 것 같은 김샘들 것까지 달걀도 네 개나 샀다. 장날 읍내 나온 시골애들마냥 우리는 다시 들떴다. 시장 지붕 사이로 황금빛 해가 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