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스러운 섬, 스리랑카 이야기

3. 루완이 선물해 준 아름다운 성지, 미힌탈레(1.10.일 오후)

노정 2016. 1. 28. 23:47

오늘 오후의 일정 :

Old Bus Station(by Tuk Tuk) - Mihantale(by Local Bus) - Kaludiya Pokuna(Black Pond) - Maha Vihara(by Tuk Tuk) - Lievis Tourist Homestay Anuradhapura(by Tuk Tuk)

 

간단히 전열을 가다듬고 승하와 둘이서만 미힌탈레를 향해 출발했다. 툭툭을 흥정해 올드버스스테이션까지. 그리고 물어물어 드디어 사람이 빼곡이 박힌 미힌탈레행 버스에 올랐다!

여행자는 한 명도 없었다. 이 버스가 맞느냐, 언제 출발하느냐, 얼마나 걸리느냐를 연신 묻는 ‘뽀얀 여자’ 둘은 금세 모든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기분나쁘지 않은 시선들. 이방인에 대한 경계나 질시가 아닌, ‘새로 우리 곁에 온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었다. 기사와 차장에게 미힌탈레에 도착하면 얘기해 달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자리가 나자 여러 사람들이 앉으라고 말해 주었고, 미힌탈레에 도착하자 또 여러 사람들이 내리라고 말해 주었으니까. 어릴 적 우리 동네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슬데없이’ 이방인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따뜻했다. 내가 오지 여행을 늘 선택하는 것은 아마 그런 ‘쓸데없는 관심과 정’이 그리워서이겠지.

아차! 생각해 보니 어젯밤에 미힌탈레에 대한 복습을 하지 않았다. 미힌탈레는 내일 일정이었으니. 처음에 여행 일정 짤 때만 열심히 읽어두었던 것들은 이미 가물가물... 내리면 바로 유적지가 나올 거라는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어디로 가지?

이 때 루완을 만났다. 지금 생각하면 그는 아마 이번 여행을 엄청나게 풍성하게 만들어 준 ‘백마 탄 기사’였지 싶다. 사원까지 2킬로미터 정도 걸리는데, 1달러를 주면 사원 입구까지 데려다 주겠으며 사원 외에 자기가 아는 아주 좋은 곳에 먼저 데려다 주겠다고 루완이 제의했다. 생각해 보니 해 지기 전에 아누라다푸라행 버스를 타려면 그 길밖에는 없겠다 싶어 바로 ‘계약’을 했다. 신의 한 수였다.

루완이 처음에 데려다 준 곳은 아쇼카 왕의 아들 마힌다 왕자가 사슴으로 변해 데바 남피야 팃사 왕과 만났다는 숲이었다. 그 위에 있는 블랙포쿠나는 ‘별유천지 비인간’이었다. 검은 빛 연못을 둘러싼 번얀트리 숲과 바위, 그 사이를 오가는 원숭이떼, 해 지기 두 시간 전, 골든타임의 저녁빛... 이런 곳에 내가 지금 있다. 꿈이 아닌 현실에서!

우리의 적극적인 반응에 신이 난 르완은 Maha Vihara 입구에 우리를 내려 주면서도 한참이나 꼼꼼한 설명을 덧붙였다. 저쪽에서 표를 구입할 것, 계단으로 올라가 맨먼저 불탑을 보고, 그 다음에 바위 끝 전망대에 올라가고, 마지막으로 다고바에 오를 것, 거기에서 일몰을 본 후 조심해서 이 자리로 내려올 것 등... 상술이 아닌 자상함이 느껴지는 ‘잔소리’였다.

탑을 향해 난 긴긴 계단을 오르기 전 우리는 간단한 요기를 하기로 했다. 나뭇그늘이 나 있는 평평한 바위 위에서 커피와 사과를 꺼내는 순간 가방을 잡아당기는 원숭이와 첫 번째 몸싸움을 했다. 그리고 곧 이어 사과에 눈이 먼 원숭이들의 공격을 받았다. 주먹으로 때리며 입을 벌려 으르렁거리는 원숭이는 작지만 맹수였다. 사과를 멀리 던져 겨우 공격에서 벗어났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아주 강한 기억으로 남았다. 그 고요한 숲속에서의 평화로운 식사도, 올라가면서 멋진 돌계단을 찍겠다는 계획도 한순간에 날아갔다. 겨우 정신을 추스르고 계단을 오르는 내게 할머니들이 몰려들었다. 신발을 벗으라는 얘기인 줄 알았는데 나를 위로하는 거였다. 괜찮냐며 걱정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쓰다듬고 다독여 주었다. 이 따뜻함 때문에 원숭이에 대한 공포가 치유되었다. 흥분한 원숭이의 포효만큼이나 강하게 남아있는, 머리 희끗한 할머니들의 다독임... 아, 이 나라는 이런 나라구나. 내가 잠시 자만해써, 또는 아름다운 경치에 들떠서 원숭이의 위험을 잠시 잊었었고, 인과응보로 습격을 당했고, 그런 나를 따뜻한 사람들이 나무라지 않고 다독여 주는구나. 이런 나라구나... 갑자기 속에서 뭔가가 뭉클하게 올라왔다.

따끈따끈한 바위의 온기를 온 발바닥으로 느끼며 바위산을 올라 부처님을 만났다. 불상 주위를 돌아다니는 원숭이가, 조심스럽긴 하지만 무섭지는 않다. 불상 바위를 내려와 스님들의 명상처로 이용되었다는, 아슬아슬한 바위 꼭대기에 올라갔다. 모레 가게 될 시기리야록의 예고편 같았다. 까마득히 가파르고 아슬아슬했지만, 끝까지 가 보고 싶었다. 발끝까지 전율을 느끼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레 디뎠다. 여자 혼자 용감하게 올라오는 나를 모두가 주의깊게 보고 응원해 주었다. ‘저 아래에 네 친구가 기다리고 있더라’ 얘기해 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바위 정상에서 부는 강한 바람은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맛이었다. 모든 것을 다 씻어내 주는... 오늘의 피로, 두려움, 힘겨움, 길고 짧았던 갖가지 일들... 모든 것들이 포맷되는 것 같았다.

조심조심 바위산을 내려와(나는 이것을 ‘미힌탈레 록’이라고 이름 붙였다.) 마하세야 다고바(Mahaseya Dagoba)를 향해 또 다시 계단을 올랐다. 커피를 마시고, 사람들을 보고, 승하에게 반한 청년들의 사진을 찍어 주고, 온 사바세계를 비추며 마지막 빛을 조용히 거두는 해님을 보았다. 어느새 내려오는 계단엔 전등이 하나 둘 들어오고 있었다.

오는 길에 르완은 우리를 ‘미힌탈레 병원 유적지(Mihintale Hospital : Quincunx)에 데려다 주었다. 사람을 눕히고 인체에 오일을 부어 치료한다는 사람 모양의 부조, ’베토루바(Vwtoruva)‘에 누워 하늘을 보았다. 오일은 없지만 온몸의 병이 낫는 것 같았다.

루완은 내일 시기리야까지 가는 데 몇 군데 ‘아주 근사한’ 유적지를 들러 툭툭으로 함께 갈 것을 제의했다. 루완이 제시한 35달러 안에는 ‘아우카나 사원’과 내가 그토록 가고 싶었던 ‘비두랑겔라 산’이 포함되어 있었다. 오늘 반일을 번 것까지 합치면 하루를 벌 수 있게 되는 달콤한 유혹. 그리고 비두랑겔라... 우리는 루완의 손을 잡았다!